《대통령의 욕조》

- 이흥환 지음 / 삼인 펴냄

 

"What is past is prologue", inscribed on Future (1935, Robert Aitken) located on the northeast corner of the National Archives Building in Washington, DC


 

  “What is past is prologue.(과거의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이 문장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폭풍우(The Tempest)》에 나오는 한 대사이다. 이 문구를 곱씹어보면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과거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과거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해서 발명된 것이 바로 ‘기록’이다. 그래서 이 문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억저장소 중 하나인 미국 워싱턴의 아카이브(기록관)에 세워진 ‘미래’의 수호신상 발 아래의 석판에 새겨져 있다. 미국은 이 ‘과거의 기록’을 세계 어느 곳보다도 철저하기 생산하고 보존하고 활용하는 국가이다. 세계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뒷받침하는 토대에는 이러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음을 이 책 《대통령의 욕조》는 자세히 알려준다.

 

미국 제27대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의 욕조 사진

 

  대통령의 욕조란 미국의 제27대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쓰던 욕조를 말한다. 태프트 대통령은 키가 180㎝에 몸무게가 150킬로그램이나 되는 거구였다. 태프트 대통령이 당선된 후 두 달째이던 1909년 1월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을 시찰할 계획이 세워졌다. 그런데 거구의 대통령을 모실 미 군함 노스캐롤라이나 호에는 이 대통령이 이용할 수 있을만한 욕조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노스캐롤라이나 호의 선장은 거대한 대통령이 이용할 수 있도록 보통사람 5명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큰 욕조를 주문하여 제작하였다. 당시 신문에는 인부 네 명이 이 욕조에 들어가 앉아있는 사진을 보도되기도 했던 이 재미있는 이야기는 일화로 그치지 않았다. 100년도 더 지난 현재 이 욕조와 욕조 주문 편지는 그대로 미국의 국가기록원(NARA)에 보존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009년 <BIG!>이라는 주제로 이 욕조와 주문서가 전시되었고 이것을 본 저자는 하찮아 보이는 저런 것까지 기록으로 남기는 미국의 사람들이 미국 역사에 100년을 보탠 사람임을 깨달았고, 그것을 이 책에 담았다.


  미국은 연방정부에서 관리하는 내셔널 아카이브(NARA)를 비롯해 각 주에서 관리하는 주립 레코드 센터 및 아카이브들을 갖추고 있다. 이 책은 이 중 우리나라의 국가기록원에 해당하는 NARA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연방정부는 NARA를 중심으로 워싱턴 국립기록센터, 연방기록물센터 등을 두고 있는데 이들은 주로 한시적인 기록물을 보존하고 영구적으로 보존해야 할 기록물은 NARA로 이관하여 보관하게 된다.


  그리고 독특하게 미국에는 대통령 도서관이라는 시스템을 두고 있다. 대통령들이 퇴임하게 되면 자비와 후원금을 모아 대통령 도서관을 짓고, 자신이 재임 중에 생산한 기록 전체를 이 도서관에 모아 놓는다. 그리고 이 도서관을 정부에 기증하고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사실은 아카이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이 체계적인 기록관리 체계 아래 아카이브들은 대통령 문서뿐만 아니라 개인 세금 보고서, 기업 세금 보고서, 설계도, 운항기록, 퇴직연금 신청서, 파산 신청서, 지도, 여권 신청서, 사회보장번호 신청서 등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 어떤 큰 일이 벌어졌을 때 가장 먼저 사람들이 찾는 곳도 바로 이러한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아카이브이다. 


  일례로 미 국적의 민항기가 외국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연방기록물센터(FRC)이다. 미 국무부 여권과는 추락기 탑승자 명단을 FRC에 알려주고 승객들의 여권 신청서를 찾아 달라고 요청한다. FRC는 보관하고 있던 여권 신청서를 뒤진다. 여기에는 최근 사진, 거주지 주소, 친인척 정보 등이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대법관 후보자 청문회가 열릴 때 가장 먼저 찾는 곳도 바로 이 FRC이다. 이 청문회가 열릴 때면 FRC의 아키비스트(기록전문가)들은 족히 1,000개 이상의 문서 상자를 뒤져야 한다.


  미국의 내셔널 아카이브에는 현재 대략 90억장 정도의 문서가 소장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1,900만장의 사진과 640만 장의 지도 등도 어림잡을 뿐 정확한 규모를 측정하기는 못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기록을 수집하여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아카이브의 자랑 중 또 하나는 이 아카이브들에 미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기록을 찾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짧게는 사나흘에서 길게는 1-2년씩도 머문다. 이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용자더러 어느 나라에서 무엇을 찾으러 왔는냐고 묻는 아카이브 직원은 없다. 어디에서 왔던 상관없고 얼마나 있든 내몰지도 않는다. 미국은 단순하게 수많은 기록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활용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몇해 전 미국의 유력한 대권주자인 힐러리의 이메일 파문이 있었다. 미국의 모든 공직자들은 이메일이나 편지도 정부 기록물로 간주하고 엄격히 관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힐러리가 개인 서버를 두고 6만통 이상의 메일을 주고받은 것이다. 이 사건이 터지자 미 국무부는 책임을 통감하고 정부 기록물의 투명한 관리를 책임질 ‘기록물 총책임자’자리를 신설하였다. 이 당시 존 캐리 국무장관은 “미국의 외교정책과 관련된 활동을 문서로 남기고 이를 대중과 의회의 요구에 따라 공개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면서 “기록물 보존과 이를 공유하는 우리의 능력은 ‘투명하고 개방된 정부’약속을 이행하려는 증거로 나는 물론 국무부 직원 모두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존 캐리 전 국무장관의 말에 미국이 이처럼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여 기록물을 관리하고 있는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철저히 기록을 남기고 이를 공개하는 것. 그것이‘투명하고 개방된 정부’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조에도 이 법의 목적을 “공공기관의 투명하고 책임 있는 행정 구현”으로 규정하고 있다. 기록을 잘 생산하고 안전하게 보존하고 적극적으로 공개․활용하는 그 길이 바로 국민과의 약속을 이행하고 신뢰를 구축하는 ‘청렴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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