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부터의 도피》

- 에리피 프롬 지음 / 김석희 옮김 / 휴머니스트

 

 

  근대적 인간은 중세에는 존재하지 않던 ‘개인’을 탄생시켰다. 이 개인은 근대적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개체화 과정’을 거침에 따라 근대적 자유의 증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개체화 과정에 따른 자유의 증대는 고독과 불안의 증대를 함께 가져왔다. 근대적 개인은 이 고독과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 방법은 '신, 국가, 공동체 등에 복종하는 것'과 '인간 및 자연과 자발적인 관계를 맺는 것'으로 나뉜다. 프롬은 후자를 진정으로 고독과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개체화된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효하고 생산적인 해결책이 하나 있다. 모든 인간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사랑이나 일 같은 자발적인 활동을 하는 방법이다.(51쪽)


  그렇다면 개체화된 인간이 모든 인간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진정한 의미의 자발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거대한 이 사회구조를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프롬은 그 돌파의 도구로 ‘사랑’을 제시하지만, 프롬도 인정하듯 그 ‘사랑’ 자체를 얻는 것도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야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개체화 과정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방금 말한 의미에서 개성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지 못하면,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때까지 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던 기본적인 관계를 단절당하면, 이 불균형 때문에 자유는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되어버린다.(51쪽)

 

  근대의 고독과 불안은 중세에 비해 개인의 삶이 예측불가능 하다는 데 있다. 중세의 삶은 그대에 비해 훨씬 더 예측가능한 틀 안에서 움직였으며, 이에 따라 어떤 확실성을 추구할 수 있었다. 이런 확실성이 줄어드는 시대에 다다르자 루터 역시 이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이는 중교개혁으로 이어졌다.

 

  루터의 해결책은 오늘날 수많은 개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들은 루터와는 달리 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즉 그들은 고립된 개별적 자아를 제거하고 개인 밖에 있는 압도적으로 강한 힘의 손에 쥐어진 도구가 됨으로써 확실성을 찾으려 한다. 루터에게 이 힘은 신이었고, 그는 절대적인 복종으로 확실성을 추구했다.(89쪽)

 

  근대 자본주의 체제는 폭발적인 과학의 발전을 통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엄청나게 높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연은 예측불가능성으로 인간을 불안에 떨게 한다. 또한 인간의 삶, 자본주의 경제와 문화 역시 지속적으로 예측불가능항 상황으로 치닫는다. 이런 상황에서 프롬이 제시한 토대인 ‘계획 경제’가 가능한가? ‘자연을 제어했듯이 사회문제를 합리적으로 제어(280쪽)’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인간은 합리와 비합리가 공존하는 존재이다. 그렇게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방법도 합리와 비합리의 방법이 공존해야 할 것이다.

 

  과연 프롬이 도달하려는 진정한 개성과 자유는 도달 가능한가? 근대는 자유를 증가시켰지만 새로운 종류의 의존을 낳았다. 프롬이 제시한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토대가 성취되어 그 아래 프롬이 이야기하는 인간이 진정한 개성과 자유를 획득된다고 할 때, 이 역시도 결국은 또 다른 의존을 낳게 되지 않을까? 프롬이 말하는 통합이나 완전한 일체가 이뤄지기에는 이 자연과 사회는 개인으로서 감당하기엔 너무 거대하다. 프롬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획득해야할 개성과 자유의 한계를 논해야 하지 않을까? 그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결국 진정한 자유를 가로막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프롬의 주장은 ‘비극적 망상’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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